녹 슨 열쇠의 변명

쩌모 2013. 9. 20. 09:36

 

녹 슨 열쇠의 변명

 

    

 

아니옵니다. 비록 녹은 슬었어도 나는 만능열쇠나 마스터키가 아닙니다. 내 열쇠는 열 수 있는 자물쇠가 딱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아마 그 자물쇠도 열리는 열쇠가 딱 하나밖에는 없을 겁니다. 이 세상이 재미있고 슬픈 이유는 그 자물쇠나 그 열쇠가 서로 만나기가 힘들다는 거지요. 그래서 이 자물쇠인가? 하고 끼워도 보고. 저 열쇠인가 ? 해서 열어도 보고.. 오로지 이 세상 단 하나밖에 없는 상대를 찾아 헤매는 그 <구도의 길> 그걸 보고 누가 음란이나 바람이나 몹쓸짓이라고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찾다찾다 지쳐서 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열리지도 않으면서 <대충> 맞는다고 치부하고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 안주합니다. 열쇠가 녹이 슬었어도 세월이 가도 이 세상 어딘가는 그 자물쇠가 있을 겁니다. 그 자물쇠를 만나 환희 속에 처음 열쇠를 넣었을 때 그때 열쇠의 모든 녹은 사라지고 열쇠나 자물쇠 모두 빤짝빤짝 빛이 나겠지요.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열쇠와 자물쇠의 운명을. 누구라서 그 운명을 바꾸겠습니까? 당신은 자물쇠에 열쇠를 끼워서 그냥 그렇게 두고 무엇에 쓰렵니까? 아무도 자물쇠에 열쇠를 끼운 채로 쓰지는 않습니다. 어쩌다 가끔 열쇠는 필요합니다. 열쇠는 자물쇠를 열 때에만 필요합니다. 여는 일이 자기의 천직인 열쇠이지만 열쇠의 역할은 어쩌다 가끔 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쇠는 깊숙이 숨겨둡니다. 자물쇠는 무엇인가를 꼭 지키는 역할입니다. 열쇠는 그 자물쇠를 열 때에만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자물쇠는 보호하지 않지만 열쇠는 소중하게 간직합니다. 열쇠는 슬픈 남자의 사랑입니다. 자물쇠는 무서운 여자의 운명입니다. 어쩌다 한번 주인의 뜻에 따라서만 열쇠는 자물쇠와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짧은 순간을 위하여 열쇠는 또 긴긴 날을 장롱 속 깊숙한 곳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자물쇠는 굳이 열쇠를 기다리지 않는가 봅니다. 때 되면 주인이 알아서 열쇠를 넣어줄 것이라고 느긋한가 봅니다. 저는 남을 잠그기만 하고 느긋한 자물쇠나, 자기는 잠그지 못하면서 남을 열어주기만 하는 열쇠나 따지고 보면 모두 우리들처럼 슬픈 사랑입니다. 그러나 열쇠나 자물쇠는 서로를 탓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길이고 역할인 것을 어쩌겠습니까? 이 세상 어딘가에는 내 이 녹이 슨 열쇠가 맞는 자물쇠가 있을 겁니다. 분명히. 분명히. 분명히. 우리가 만나지 못해도 이 세상 어딘가에는 내 이 녹이 슨 열쇠를 기다리는 자물쇠가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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