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 일기
룸싸롱은 아늑하다
없는 것이 없다
술이 많고
여자 많고
음악 많고
써비스도 만점이다
어리고 예쁜 여자들이 득실득실거리고
방마다 밴드가 궁짝거린다
지루박과 디스코가 어우러진다
부딪히는 술잔 소리가 낭낭하고
허세와 애교가 범벅이 되고
살 비비는 소리가 요란하다
은희는 신출내기다
이제까지는 회사 경리였으나
오늘부터는 밤에도 뛰어야 한다
술잔을 들며 잔에 아롱진
부은 눈을 본다
또 한잔을 들며 오늘은
몇탕이 걸릴까 기대한다
또 한 잔을 들며 오늘
걸리는 손님은 점잖았으면 한다
또 한 잔을 들며 오늘 팁은
몇만 원이 될까를 그려 본다
또 한 잔을 들며 매일 시달리는
사글세 일수돈 적금부금을 계산한다
또 한 잔을 들며 자리에 누운
불쌍한 아버지를 기억한다
또 한 잔을 들며 시장 좌판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어머니를 본다
또 한잔을 들며 책상에서
밤늦게 공부하는 동생들을 생각한다
또 한잔을 들며 자기 때문에 어느
술집에서 울고 있는 애인을 떠올린다
또 한 잔을 들며 삼년 뒤 삼천만원으로
삼십 평짜리 까페 속에 앉아 있을
삼십 살의 자기 자신을 그려보며
모든 잡념을 떨쳐 버린다
벌써 손님이 보채고 있다
취한다
취할수록 슬프고
슬플수록 목구멍을 넘어가는
짜디 짠 체액을 느낀다
은희는 이를 악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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